중용(中庸)의 지혜

“믿음의 가정” – 신명기 6:4-9
05/24/2020
2020.5.31 주일주보
05/30/2020

사람은 항상 흑백논리를 가지고 모든 것을 둘로 나누려고 합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내 편과 네 편 그리고 이익과 손해 같은 논리로 세상을 명확하게 이분(二分)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흑백 지대'(Black and White Area)가 아니라, ‘회색지대'(Gray Area)입니다.  이 회색지대에서는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검은색이고, 또 달리 보면 흰색입니다.  모든 것이 애매하고 불투명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는 함부로 속단해서 결정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중용(中庸)의 도(道)가 필요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실수를 초래하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아들 이름으로 된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에서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으로 ‘중용’을 들었습니다.  동양의 중용사상과 다소 느낌은 다르지만, 극단적인 한 면으로 치우치지 않고 가장 합리적인 것을 선택하려고 하는 점에서는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중용을 추구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외날 검이 아니라, 양날 검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항상 두 가지 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좋으냐?” 또는 “어느 쪽이 옳으냐?”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공평해서 밝은 면이 있으면, 반드시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좋은 면만 있다든지 반대로 나쁜 면만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 “커피(coffee)가 몸에 좋으냐, 나쁘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던 적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커피를 거의 독약 수준으로 몰아붙였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신이 주신 보약”이라고 한껏 추켜세웠습니다.  커피는 혈액순환에 좋고, 비만을 예방하며, 커피 특유의 그윽한 향기는 심신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반대로 커피는 위장병과 불면증을 유발하고 카페인 중독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반박을 했습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커피는 이 두 가지 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커피를 어떻게 마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커피를 여과지(filter)를 통해 알맞게 내려 마시면 혈액순환에도 좋고,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지만, 너무 과도하게 많이 마시거나, 설탕을 들여 부어 꿀 커피로 마실 경우, 또는 에스프레소(espresso) 커피와 같이 여과지가 없는 상태로 진하게 농축해서 마시게 되면, 콜레스테롤이 증가하고 위장에도 큰 자극을 주게 됩니다.  커피는 그 자체로만 따지면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커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똑같습니다.  육식을 많이 하면 힘이 좋고,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지만, 반대로 차분함이 떨어지고 지구력이 약해집니다.  또, 채식을 즐기면 성품이 온순하고 집중력이 강해지는 반면에 순발력과 진취적인 힘이 부족해집니다.  살이 찌면 여유가 있고 온화해 보이지만, 게으르고 욕심이 많아 보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마른 체형은 성실하고 부지런해 보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까칠하고 날카로워 보이기도 합니다.  청바지를 즐겨 입으면 사람이 검소해 보이고 서민적으로 느껴지지만, 너무 청바지에만 집착하면 성격이 외골수이거나 품격이 떨어져 보이기도 합니다.  양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잘 어울리는 양복이라도 매일 입게 되면 사람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답답해 보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안정감과 믿음을 주기도 합니다.  한국 사람인데 영어를 너무 똑 부러지게 잘하면 똑똑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뿌리 없는 사대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미국까지 왔는데 영어 한마디 할 줄 모르고 한국말과 한국 것만 고집한다면 무능하고 미련해 보일 것입니다.  어느 한쪽 만을 고집하기보다는 양쪽을 다 수용하면서 합리적으로 조절하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살펴보면 그 속에는 반드시 해롭게 하는 것들이 있고, 아무리 나쁜 것도 헤아려보면 그것으로 인해 얻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  너무 좋다고 자랑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너무 힘들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반드시 두 가지 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주어진 상황에서 얻게 될 좋은 것을 추구한다면, 나름대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게 될 것입니다.  올해 초에 갑자기 불어 닥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많은 것들이 엉망진창이 되고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사업이 곤두박질치고, 평범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특별한 것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새롭게 얻게 된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 인생의 우선순위(Priority)가 명확하게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가족들을 위해서 수고한다는 명목으로 가족들을 등한시했는데, 이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서 정말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집에만 있게 되면서, 배우자와 자녀들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재조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 기간을 통해서 정말 끝까지 가야 할 사람들과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그동안 편안하게 누려왔던 것들이 이제 보니 얼마나 감사한 축복이었는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각의 지평이 넓어진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사람을 함부로 속단하는 편협한 시각을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몇 주 전, 주일 아침에 성도님 중의 한 분이 일찍 교회에 오셔서 마당을 서성이고 계셨습니다.  아직 ‘대면 예배'(In-Person Worship)를 드릴 수는 없지만, 교회 마당이라도 한번 밟아보고, 손수 헌금도 드리고 싶어서 일찍 오셨다고 합니다.  그분이 저를 보자마자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터뜨리셨습니다.  저는 예전에 그분이 그렇게 신앙심이 깊은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손님처럼 오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큰 착각이었습니다.  그분의 말과 행동 속에는 깊은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마당에서 기도를 드리는데,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주일인데도 예배를 드릴 수 없는 딱한 현실에 대한 개탄의 눈물이기도 했지만, 그 소중한 성도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죄스러움과 저의 무지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시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한 마디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습니다.  “너, 여태까지 목회 헛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저의 형편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좀 더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